아마겟돈(Armageddon) 체스 경기에서는 누가 유리할까?
체스 대회를 보다보면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를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뭔가 의미심장해 보이는 단어인데요, 아마겟돈은 무엇을 뜻하는 단어일까요?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뜻이 나와있습니다.
[국어사전] 아마겟돈(Harmagedon) : (명사)선과 악의 세력이 싸울 최후의 전쟁터. 팔레스타인의 도시 므깃도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요한 계시록에 나온다.
[영어사전] Armageddon : (명사) 아마겟돈(지구 종말에 펼쳐지는 선과 악의 대결)
뭔가 종교적인 느낌으로 최후의 전쟁이 연상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체스에서는 어떻게 사용될까요? 최고의 체스 선수를 가리는 체스 세계챔피언전 포맷을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FIDE(세계체스연맹) 규정에 따르면 세계챔피언전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 스탠다드 12경기 : 100분, 40수 이후 50분 추가, 60수 이후 15분 추가, 매 수마다 30초 증가
- 라피드 4경기(스탠다드에서 6-6인 경우) : 25분, 매 수마다 10초 추가
- 블리츠 4경기(라피드에서 2-2인 경우) : 5분, 매 수마다 3초 추가
- 아마겟돈 1경기(블리츠에서 2-2인 경우) : 백 5분, 흑 4분, 60수 이후에 매 수마다 3초씩 추가
※ 무승부가 된 경우 흑으로 경기한 선수가 승리한 것으로 판정
마지막에 있는 아마겟돈 경기가 보이시나요? 맞습니다. 아마겟돈은 체스에서 두 차례의 연장전(타이브레이크)으로도 승부가 갈리지 않은 경우에 실시하는 마지막 경기입니다. 사전에서 나온 것처럼 체스 경기의 '최후의 전쟁터'인 셈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뜻이나 선과 악의 대결은 아니지만요. 백과 흑으로 경기한다는 것과 최후의 전쟁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체스 경기는 백으로 경기하는 선수가 유리하기 때문에 모든 연장전은 백/흑 색깔을 바꿔서 짝수로 실시합니다. 하지만 경기가 단판이 아니고 체스라는 경기 특성상 무승부가 나오기가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승자가 나올때까지 무한정 경기를 계속할 수 없으니 승부를 가르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축구로 따지자면 '승부차기'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겟돈 경기에는 축구의 승부차기처럼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정말 크게 작용합니다.
아마겟돈 경기는 백으로 경기하는 선수가 1분을 더 가지고 경기합니다(백 선수 5분, 흑 선수 4분). 일반적인 블리츠처럼 매 수마다 3초씩 증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1분은 큰 차이를 가지고 옵니다. 백으로 경기하는 선수는 첫 수를 둔다는 이점과 함께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으로 경기하는 선수는 반드시 승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경기가 무승부로 끝났을 때는 흑으로 경기한 선수가 승리한 것으로 판정하기 때문입니다. 흑으로 경기하는 선수는 큰 불리함을 가지고 경기하지만 무승부가 되었을 때 자신이 승리한다라는 심리적인 보험을 가지는 셈입니다.
백으로 경기하는 선수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는 심리적인 압박을 받고,
흑으로 경기하는 선수는 '적어도 비겨야 한다.'라는 심리적인 압박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마겟돈 경기에서 어느 색으로 경기하는 것이 유리할까요?
구글에서 아마겟돈 관련 내용을 검색하다 찾은 내용입니다. 2001년 이후 FIDE에서 주관한 메이저 대회에서 나온 아마겟돈 경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1-0은 백 승, 0-1은 흑 승, ½-½는 무승부를 나타냅니다. 남자 그랜드 마스터(GM) 선수들 데이터만 발췌하였으며, 영어 전문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FIDE World Chess Championship 2002
GM Zoltan Gyimesi 1-0 GM Stuart Conquest
GM Emil Sutovsky 1-0 GM Alonso Zapata
GM Lazaro Bruzon 1-0 GM Liviu-Dieter Nisipeanu
GM Jaan Ehlvest 1-0 GM Ilia Smirin
GM Veselin Topalov 0-1 GM Alexey Shirov
Chess World Cup 2005
GM Vadim Zvjaginsev ½-½ GM Yuri Shulman
GM David Navara ½-½ GM Predrag Nikolić
GM Zviad Izoria 0-1 GM Sergey Erenburg
GM Evgeniy Najer 1-0 GM Shakhriyar Mamedyarov
GM Vadim Zvjaginsev ½-½ GM Yuri Shulman
GM Sergei Tiviakov 1-0 GM Oleg Korneev
GM Loek van Wely 1-0 GM Alexander Moiseenko
Chess World Cup 2007
GM Michael Roiz 1-0 GM Varuzhan Akobian
GM Nikita Vitiugov 0-1 GM Konstantin Sakaev
GM Zhou Jianchao 1-0 GM Andrei Volokitin
GM Kiril Georgiev 1-0 GM Rustam Kasimdzhanov
Chess World Cup 2011
GM Yuri Drozdovskij 1-0 GM Alexander Motylev
GM Leinier Domínguez Perez 1-0 GM Igor Lysyj
Chess World Cup 2013
GM Evgeny Tomashevsky 1-0 GM Alejandro Ramírez
GM Hrant Melkumyan 0-1 GM Julio Granda
GM Daniil Dubov 1-0 GM Ruslan Ponomariov
Chess World Cup 2015
GM Mateusz Bartel ½-½ GM Gabriel Sargissian
GM Michael Adams 1-0 GM Viktor Láznička
GM Nepomniachtchi 0-1 GM Hikaru Nakamura
Chess World Cup 2017
GM Levon Aronian 1-0 GM Maxime Vachier-Lagrave
Chess World Cup 2019
GM Evgeniy Najer 0-1 GM Anish Giri
GM Yu Yangyi 1-0 GM Nikita Vitiugov
World Chess Armageddon Series 2019
Nepomniachtchi 0-1 Karjakin
Radjabov ½-½ Karjakin
Radjabov 1-0 Dubov
Radjabov ½-½ Kramnik
결과는, 백으로 경기한 선수 기준으로 18승 6무 7패입니다. 무승부는 흑의 승리로 판정하기 때문에 백과 흑의 승률은 각각 58%와 42%입니다. 물론 선수마다 실력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모두 그랜드 마스터라는 점과, 타이브레이크로도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비슷한 조건이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근소하게 백이 앞서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많은 선수들은 흑으로 경기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얻은 것의 가치보다 잃어버린 것의 가치를 크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1만 원을 공짜로 얻었을 때 느끼는 행복감보다 1만 원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가만 있으면 중간을 간다'는 속담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흑으로 경기할 때 '비기기만 하더라도 내가 승리한다.'라는 생각이 선수들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줍니다. 선수들 입장에서는 첫 수를 두는 백이 근소하게 유리한 게임인 체스에서 중간만 하더라도 무승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GM 레벨에서 무승부의 비율이 높은 것도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연장 접전으로 지친 상황에서, 심리적인 압박을 가지고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사람이 침착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백으로 경기하는 선수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한 수를 두기 쉽고,
흑으로 경기하는 선수는 비겨도 된다는 생각에 기회를 놓치고 수비적인 수만 두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황을 더 선호하시나요?